□ 핵심탐구
▶삼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
▶삼국의 지배체제와 사회
▶삼국 간의 관계와 각축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 속에서 삼국의 대외관계고조선의 멸망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
▶삼국의 불교 수용과 그 의미
□ 핵심요약
1. 삼국의 건국과 발전
만주와 한반도 지역의 여러 소국 가운데 주변 지역을 정복하며 넓은 영토와 군사력, 경제력을 갖춘 고대국가로 발전한 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었다. 고구려는 '나' 집단의 통합을 이루며 5부 가운데 계루부를 중심으로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1세기 후반에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하였다. 일찍부터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이며 성장한 고구려는 5세기 초에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전하였다. 한반도 중서부의 요지에 자리 잡은 백제도 주변 소국들을 정복하면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동해안과 낙동강 유역의 소국들을 정복하며 발전한 신라는 진흥왕 대에 영역을 크게 확대하고 한강 하류 지역까지 확보하여 삼국 간의 각축에서도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2. 삼국의 고대국가체제의 확립
삼국은 각각 4세기에서 6세기경에 통치조직과 율령, 신분제 등을 갖추면서 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독자적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던 지배자들은 중앙의 지배 귀족으로 편입되었고, 농민층은 국가의 공민으로 편제되었다. 영토가 늘고 농민층이 분화하면서 삼국은 통치조직을 갖추게 되었고 사회적 활동에 엄격한 제한을 두는 신분제로 지배층의 권위를 뒷받침하였다. 또한 철제 농기구 및 우경의 보급과 함께 수리시설을 확충하여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을 보호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3. 삼국의 대회관계와 수(隋)·당(唐)의 침략
중국에서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촉·오의 삼국을 거쳐 5호 16국의 분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침략에 맞서면서 영역을 확대하여 5세기 후반 최대 판도의 강대국이 되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변화에 따라 여러 나라와 다각적 외교를 펼치고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교류하며 독자적 문화를 이룩하였다. 백제는 중국 및 왜와 활발히 교류하며 한때 요서 지방을 점령하고 남조의 나라들과 활발히 교역하며 중국 동해안 일대에 중간 기항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세기말 수나라가 일어나 중국을 통일한 뒤 고구려의 독자적 세력을 부정하며 침략하였고 다시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도 자국 중심의 질서를 내세우며 침략하였다. 여러 차례의 침략을 물리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 소모가 컸고 귀족들의 내분이 계속되었다.
4. 삼국의 불교 수용과 그 의미
삼국은 건국시조를 천신의 후손이라고 하는 신화와 제천의례를 중심으로 한 종교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지배체제를 갖추면서 불교와 유교, 도교 등을 받아들였다. 삼국은 특히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불교는 정법으로 온 세상을 통일하고 다스린다고 하여 정복전쟁을 정당화해 주었고 왕 중심의 집권체제의 확립을 뒷받침해 주었다.

인물탐구
광개토대왕 374~412 고구려 제19대 왕. 이름은 담덕이며 즉위 후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소수림왕 대에 정비된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영토 확장에 나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였고 군대를 보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북쪽으로 모용씨가 세운 후연을 공격하였고 북부여, 숙신, 동부여 등을 정복하여 북으로는 송화강, 동북으로는 시베리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수왕 394~491 고구려 제20대 왕으로 70여 년간 왕위에 있었다. 중국의 남북조 여러 나라와 적극적인 외교를 벌였으며 중국의 분열상을 이용하여 고구려의 국제적 위치를 높였고, 특히 북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 안으로 왕권강화와 집권기반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417년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국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국가 운영을 새롭게 하고 백제와 신라 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백제에 도림이라는 승려를 보내 내정을 교란시킨 후 475년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전사시켜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해야 했다. 신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눌지왕을 즉위하게 하였다.
근초고왕 백제 제13대 왕. 재위 346~375년. 남으로 마한을 병합하고 북으로 고구려가 차지한 대방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고구려 평양성까지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살해했다. 또한 한산으로 천도하여 한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남조의 동진과 외교를 맺어 남조문화를 받아들였고 아직기와 왕인을 일본에 보내 문화를 전하게 하였다.
성왕 ?~554 백제 제 26대 왕. 538년 사비로 천도하여 지배질서와 국왕 중심의 권력체계를 정비하였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지배체제는 내관 12부와 외관 10부의 22부 체제를 갖추었으며 지방을 5방으로 나누고 방 아래에 군현을 두었다. 또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었다. 중국의 남조와 자주 교류하였고 겸익 등을 인도에 보내 불경을 수입하여 직접 번역하게 하였다. 노리사치계를 일본에 보내 불교를 전하였다. 551년 신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 진흥왕이 동맹을 무시하고 한강 하류지역까지 장악하자 성왕은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에서 왕은 전사하고 백제는 크게 패하였다.
지증왕 신라 제22대 왕. 재위 500~514, 502년 순장을 금하고 우경을 하게 했다고 전하여 국가적으로 농업을 장려한 것으로 보인다. 503년 국호를 신라라고 하고 505년 주군현을 정했으며 509년 수도인 경주에 시장을 설치하였다. 512년에는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하여 신라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법흥왕 ?~540 신라 제23대 왕. 부왕인 지증왕의 개혁을 이어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517년 병부를 설치하고 520년에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처음으로 상대등을 임명하였다. 522년 대가야와 동맹을 맺고 남쪽 지역으로 팽창을 시도하여 532년 금관가야의 항복을 받았다. 536년에는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했다. 521년에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던 종래의 외교에서 벗어나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또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말년에는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연개소문?~666 고구려의 장군·정치가. 장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압박하던 시기에, 그는 동부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 국경 수비를 맡으면서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영류왕과 대신들이 그를 제거할 음로를 꾸몄으나 먼저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642년 정권을 장악했다. 대외적으로 강경책을 펼쳐, 백제의 공격에 구원을 요청하러 왔던 신라의 김춘추를 감금하고 당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당 태종이 20만 대군으로 공격해 오자 안시성에서 격퇴하였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다. 또 중국에서 도교를 받아들여 장려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인 남생·남산·남건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고구려의 멸망을 재촉하였다.

역사용어탐구
부여 건국신화에 의하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고, 그의 아들인 해부루 때에 동해 기슭의 가섭원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라고 했으며, 금와와 대소가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전한다. 부여는 서기전 4~3세기경 국가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이며,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요하 상류와 송화강 유역에 자리 잡고 남쪽으로 고구려, 동쪽으로 읍루, 서쪽으로 선비족과 접하였다. 인구는 약 8만 호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는 곳이었다. 마가, 우가, 구가, 저가 등의 가(加)가 있고 그 밑에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의 관직이 있었다. 가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전쟁의 선포, 형벌의 적용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풍습은 흰 옷을 즐겨 입고 정월에는 영고라는 제천행사를 행하였다. 서기 21년~27년 부여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고구려에 예속되었으며, 494년 고구려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졸본 고구려 최초의 도읍지. 시조 주몽이 부여를 떠나 비류수 지역의 졸본 땅에 가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졸본에는 고구려의 시조묘가 있어 수도를 옮긴 후에도 역대 왕들이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비류국 비류수 상류 지역에 있던 고대의 소국. 시조 주몽이 처음 비류수 가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자, 그 상류에 있던 비류국의 왕인 송양이 주몽에게 속국이 될 것을 요구했으나 도리어 비류국이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고 한다.
옥저 함경도 해안에서 두만강 일대에 걸쳐 존재했던 고대의 세력 집단. 함흥 일대에 있던 집단을 동옥저, 두만강 유역의 집단을 북옥저라고 했다. 3세기 전반에 동옥저는 5000여 호로, 그 주거지역은 1000리가량이며 농업이 주업이고 언어·의복·음식·풍습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고 한다. 민며느리제와 장례에 가매장을 했다가 뼈만 추려 가족묘에 묻는 골장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옥저는 읍락별로 족장이 다스렸는데 위만조선과 고구려 등 강대국에 예속되어 공납을 바쳤다.
고구려의 5부 고구려 초기 연맹체 형성에 중심이 된 다섯 집단. 본디 '나'로 칭해진 여러 집단이 점차 통합되어 1세기 태조왕 대에 계루부를 중심으로 5부를 이루었다. 5부는 계루부와 소노부, 관노부, 절노부, 순노부인데, 각 부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역·외교·전쟁 등 전체의 문제는 계루부 출신 왕으로 대표되는 연맹체의 통제를 받았다. 처음에는 소노부가 우세하다가 6대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후에도 소노부는 다른 부족보다 우위에 있었고 절노부는 계루부와 혼인관계를 맺으며 왕비족이 되었다. 차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면서 5부는 고유의 이름을 잃고 동·서·남·부·중부로 명칭을 바뀌어 수도의 행정구역이 되었다.
진대법 194년(고국천왕 16) 실시한 빈민 구제책, 국상인 을파소의 건의로 시행되었고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이자를 붙여 되돌려 받는 제도이다. 후일 고려, 조선의 의창이나 환곡도 이와 비슷한 제도이다.
율령 형벌 및 행정에 관한 체계. 율은 형법에 해당하고 영은 행정 법규에 해당된다. 삼국 모두 율령을 반포했다는 기록이 전하나 제도로 완성된 것은 통일신라 때였다. 율령제는 중국 수·당 대에 완성되었고 이후 역대 왕조에서 입법의 기본 체계로 받아들여졌다.
목지국 월지국이라고도 하며 마한의 50여 개 소국을 주도하는 중심세력이었다. 그 신지(臣智)인 진왕은 마한 연맹체의 맹주로서 진한과 변한 소국들에도 지배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백제의 성장과 함께 약화되어 백제에 통합되었다. 목지국의 위치는 한강 유역의 위례성, 전북 익산, 충남 직산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방 한강 이북의 경기도 지방과 자비령 이남의 황해도 지방을 총칭한 이름. 한(漢)무제 때 낙랑군에 속한 현이었다가 후한 말 대방군이 설치되었다. 대방군은 낙랑군 남부도위 소관의 7현을 관할하면서 그 치소를 대방현에 두었다. 후한 멸망 후 위(魏)에 속했다가 백제에 병합되었다.
골품제 신라의 신분제도. 왕족은 성골과 진골이었고, 귀족들은 6두품에서 4두품에 위치하였다. 원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3두품에서 1두품은 평민 화하여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골품제는 신라가 주변 소국이나 집단의 족장세력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 세력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주던 것에서 법흥왕 대에 성립한 것으로 보인다. 성골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진덕여왕을 끝으로 단절되어 무열왕부터는 진골이 왕이 되었다. 골품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지위는 물론 집의 크기나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차등 있게 규정되어 있었다.
화백 신라의 국대 중대사를 결정하는 귀족 연합적 정치기구. 4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국가 중대사가 발생하면 그중 한 곳에 귀족회의를 소집하여 정책을 토의하고 결정했다고 전한다. 화백의 장은 상대등이고 의결 방법은 만장일치였다.
우산국 울릉도에 있던 소국. 신라에 조공을 바치지 않자 지증왕 대에 하슬라주(지금 강릉)군주인 이사부에게 토벌하게 하여 병합하였다.
진흥왕순수비 진흥왕이 정복한 지역을 순수하면서 세운 비석.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경남 창녕(561년 건립), 북한산(568~569), 함경도의 황초령, 마운령(568)과 군사적 요충지인 단양의 적성비(551)까지 5개이다. 이 비문들은 신라의 관제, 신분제 등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화랑도 신라의 청소년 수양 단체. 국산도· 풍월도라고도 한다. 왕족이나 귀족 자제 중에서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화랑이라고 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낭도라고 했다. 화랑도는 전국의 산천과 명승을 두루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는 일종의 전사단체였다. 화랑도를 통하여 현명한 충신과 뛰어난 장수 병졸이 배출되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고 대표적인 예가 관창과 김유신이다.
읍락 고대 초기에 존재했던 지역공동체. 부여의 읍락에는 호민과 하호가 있었고 가(加)의 통치를 받았다. 고구려는 읍락을 단위로 공동생활이 이루어졌으며 군장급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부경이라는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동옥저의 읍락은 군장이 없고 장수가 다스렸다. 예에서는 읍락들 간의 경계가 명확하여 다른 읍락 지역을 침범하면 소나 말, 노비로 변상해야 했다고 전한다.
가 加 족장의 칭호. 삼한의 간과 같은 말이다. 고구려의 대가들은 세력이 큰 족장 출신으로 왕과 마찬가지로 그 맡에 사자, 조의선인과 같은 관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가들이 모인 평의회에서 형벌의 집행과 전쟁 선포 등을 논의하였다. 고구려 관직의 고추가, 상가 등의 이름도 원래 이들이 족장 출신이었음을 보여 준다.
사자 使者 고구려 관직의 하나. 사자는 원래 족장의 밑에서 수취를 담당하는 관리였다. 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앙 관료화하여 행정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6세기 이후 태대사자, 대사자, 소사자 등으로 분화되었다.
조의 皂衣 고구려 초기 관직명의 하나. 주로 사령의 일을 맡은 관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 兄 고구려의 관직명. 태대형, 조의두대형, 대형, 소형 등이 있었다. 형은 원래 연장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족장 세력이었으나 국가체제의 발전 과정에서 그 지위에 따라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좌평 佐平 백제의 16관등 가운데 최고위 관등으로 귀족회의체의 장의 역할을 하였다. 좌평은 처음에 1명이었으나 전지왕 대에 상좌평이 설치되었고, 성왕 대에 6 좌평으로 강화되었다. 내신(왕명 출납), 내두(창고 재무), 내법(의례), 위사(숙위), 조정(형벌), 병관(대외 병마)의 6 좌평 가운데 내신좌평이 수석이었다.
간 干 고대의 족장이나 소국의 지배자를 칭하는 말. 한 또는 칸이라고도 하며 그 뜻은 '크다' 또는 '큰 사람'이고 동북아시아 종족들 사이에서 군주를 부르는 용어이다. 신라는 초기에 왕을 거서간, 마립간이라고 했고, 지방 세력에게 수여한 관직에도 술간, 고간, 귀간 등의 이름이 있다.
외위 外位 신라가 지방 유력자들을 포섭하기 위하여 마련한 관등 체계. 왕경인을 대상으로 한 경위(京位)와 차별을 두어 외위를 설정하였으며 경위 체계가 완성된 6세기 초 법흥왕 때 11등급의 외위도 갖추었다. 그러나 7세기 중엽 삼국 간의 항쟁이 격화되면서 지방 촌주층에 대한 포상의 하나로 경위를 개방하면서 외위는 소멸되었다.
사료탐구
백제의 건국설화 『삼국사기』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명하여 졸본부여로 왔다.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있다가 졸본부여왕이 돌아가자 주몽이 그 대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라 하고 차자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오간, 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갔는데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 북한산)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여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미추홀은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사람이 살기에 그리 좋지 못한 곳이었다. 결국 다시 돌아와 위례성을 보니 벌써 도읍이 자리가 잡혔고 백성들도 별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비류는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다가 죽고 말았다. 비류를 따랐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여 백성들이 많아지고 나라의 세력도 커지자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리고 그 조상이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부여(夫餘)씨라고 하였다.
(『삼국사기』권 23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창조리전(倉助利傳) (고구려) 봉상왕 9년 8월에 왕이 장정으로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은 식량이 궁핍하고 노역에 피곤하여 유망하게 되었다. 창조리가 간하기를, "천재가 거듭되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살 곳을 잃고 장정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늙은이와 어린아이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근심하여 걱정하며 수양을 할 때이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이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주린 사람들을 부려 토목 공역에 시달리게 하시니, 이것은 백성의 부모가 된 뜻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더욱이 이웃에 강한 적이 있으니 만일 그들이 우리의 피폐한 틈을 타서 온다면 사직과 백성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왕이 노여워하여,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거인데,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의 중함을 보여 줄 수 없지 않소.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찬을 얻으려는 것인 듯하오."라고 하였다.
창조리가 다시 아뢰었다. "임금이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면 인(仁)이 아니요, 신하가 임금을 간하지 않으면 충(忠)이 아닙니다. 신이 국상의 자리에 있는 이상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온데, 어찌 감히 칭찬을 받으려 하는 것이겠습니까?" (『삼국사기』권 49)
마운령비문(魔雲嶺碑文) 부드러운 바람이 불지 않으면 세상의 질서가 참다움에서 어긋나고 가르침을 펴지 않으면 삿됨이 서로 성행하게 된다. 이로써 제왕이 연호를 세우고 스스로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짐은 돌아오는 운수에 응하여 태조의 기업을 몸소 우러러 잇고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삼가고 스스로 조심해서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려워했다. 또한 천은을 입어 좋은 운이 열리고 조용히 신령이 감응하여 상서로움에 부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방이 지경(地境)을 의탁해 오니 백성과 땅을 널리 얻게 되었다. 이웃 나라들은 믿음을 서약하고, 사신이 서로 왕래하며 조정은 스스로 헤아려 새 백성이나 옛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니 진실로 교화가 두루 미치고 나라의 은혜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이에 무자년(568) 가을 8월 관할 지역을 돌아보고 민심을 파악하여 위로를 베푸는 것이다. 만일 충직하고 미더우며 정성스럽고 재능이 뛰어나 위태로움을 미리 살피고 전쟁을 당하여 용감하게 싸워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유공한 무리들에게는 더욱 상과 벼슬을 주어 그 공훈을 표창할 것이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 임신년(612년으로 추정)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며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이후 충도(忠道)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일 이 서약을 어기면 하늘에게 큰 죄를 얻을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일 나라가 편안치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우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시, 상서, 예기, 춘추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출처: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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