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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이해

1장 원시사회와 고조선

MomNissi 2023. 11. 2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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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탐구

▶구석기·신석기·청동기문화의 전개와 중요 유물·유적

▶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발전

▶8 조법금을 통해 본 고조선 사회의 성격

▶고조선의 멸망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

 

핵심요약

1. 원시사회의 전개

원시시대에 대하여는 인류가 만들어 썼던 도구와 살았던 흔적들에서 자연환경과 원시인들의 생활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사의 무대가 되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도 많은 유적·유물이 발견되어 구석기, 신석기문화를 거쳐 청동기문화 단계로 발전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평양부근의 상원 검은 모루 동굴, 덕천 승리산동굴, 연천 전곡리, 공주 석장리 등 유적에서 뗀석기를 사용하며 수렵·채집생활을 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농경이 시작되고 원시공동체 생활을 한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000년 무렵에 시작되었다. 대표적 유물은 간석기와 빗살무늬토기이며 유적은 강변과 서남해안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금속을 이용하게 된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이 본격화되었다.

 
© 12019, 출처 Pixabay

 

2. 단군신화와 고조선의 성립

단군신화는 '조선' 이라는 고대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늘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환웅과 그 무리가 이주해 와서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고 농사,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모든 일을 다스렸다고 한다. 이처럼 농경사회를 배경으로 선진 문화를 가지고 이주해 온 환웅 집단과 곰 집단의 연합으로 고조선이 성립된 과정을 전해 준다. 그 지배자인 단군왕검 제정일치의 군장으로서 자신의 조상을 하늘과 연결하여 신성화하였다.

 

3. 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발전

고조선 농경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성립된 최초의 고대국가이다. 고조선은 차츰 주변의 세력 집단들을 아우므로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초기에는 주도세력에 의해 주변 여러 집단이 매우 느슨한 형태로 결합하였으나 점차 지배체제를 정비하면서 기원전 4세기경 국가기구와 관료제도, 군사력 등을 갖추게 되었다. 후기에는 무리를 이끌고 이주해 온 위만이 준왕에게 정권을 빼앗아 왕조가 위만조선으로 교체되었다.

 

4. 8조법금과 고조선의 사회상

고조선의 8조법금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3개 조항에서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고 사유재산을 보호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이를 침해하는 경우 엄격하게 처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분은 귀족과 일반 평민, 노비로 나뉘었다. 귀족은 지배층으로서 많은 노예를 부리며 살았다. 평민은 하호라고 하였는데 죄를 짓거나 빚에 몰리게 되면 신분이 노비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고조선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을 담당한 것은 하호와 노비였다. 또 요동 지방에서 발견된 귀족의 무덤인 강성무덤, 누상무덤에는 많은 노비가 순장된 것으로 나타나 고조선 지배자들의 권세를 엿볼 수 있다.

 

5. 고조선 멸망 후 한사군의 설치와 그 영향

고조선이 멸망한 뒤 한은 낙랑·진번·임둔·현도라는 4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고조선 주민들은 촌락 단위로 한의 군현에 예속되었고 한의 통치는 낙랑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의 지배는 토착 주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진번과 임둔은 설치된 지 20여 년 만에 폐지되었고 현도군도 얼마 안 되어 신흥 세력인 고구려에 쫓겨 서쪽으로 옮겨 갔다. 낙랑군은 무력을 중계하는 기지 역할을 하며 가장 오래 존속하였으나 주민들의 저항 때문에 느슨한 통치를 하는데 그쳤다.

 

© KIMsookhyun, 출처 Pixabay

역사용어탐구

뗀석기 돌을 깨뜨리거나 떼어내 만든 석기로, 뗀석기는 구석기시대 전기에는 석재가 되는 자갈돌을 망치돌로 한 면을 때려 내어 만든 찍개를 사용했고, 이때 떨어져 나온 격지도 손질을 약간 가하여 긁개로 만들어 썼다. 중기에는 몸돌에서 떼어 내 석기를 만드는 기술이 개선되어 격지를 날카롭게 손질하여 찌르개, 긁개, 새기개 등을 만들었다. 후기에는 간접적으로 격지를 떼어내는 수법이 발달하면서 소형 도구가 많이 나타나며 돌화살촉, 밀개, 긁개, 찌르개, 뚜르개 등을 만들었다.

출처: Basic 중학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간석기 돌을 갈아서 만든 도구.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생활 도구로 사용되었다. 몸돌을 골라 적당한 모양으로 깨뜨린 다음 갈고 다듬어 만드는데, 전체면을 갈아서 만들 것과 필요한 부분만 다듬은 것이 있다. 괭이, 가래, 호미, 반달돌칼 등 농사도구와 갈돌, 돌도끼, 홈자귀, 턱자귀, 끌 등 일상생활 용구 등이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간석기는 철기의 보급이 늘어마면서 쇠퇴하였다.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의 토기. 빗살무늬토기는 지역에 따라 제작 과정이나 무늬의 종류, 생김새 등이 달라서 지역적 특성과 사회적 배경의 차이 등을 보여 주며 모양과 표면의 무늬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된다. 서해안 지역(대동강, 한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밑이 뾰족하고 표면에 사선 무늬가 많이 새겨져 있다. 동해안 지역(두만강 유역과 강원도)에 분포하는 토기는 밑이 납작하고 그릇의 입 부분에 물고기뼈나 번개 모양이 새겨져 있다. 남해안 지역(낙동간 유역과 남해안)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여러 가지 형태가 섞여 있다.

 

토테미즘 totemism 특정한 동물을 종족의 조상으로 받들고 숭배하는 신앙. 수렵으로 살아가던 시기에 생겨난 것으로 원시씨족공동체의 사회적 관계를 특정한 동물에까지 옮겨 동물과 사람이 공동의 조상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였다. 건국신화의 시조설화들에 나타나는 곰이나 닭, 말 등은 토템 신앙을 보여 주는 것이다.

 

민무늬토기 청동기시대의 토기. 빗살무늬토기보다 용도와 모양이 다양해진 민무늬토기는 굵은 모래가 섞인 바탕흙을 써서 갈색 또는 황갈색을 띠며 무늬가 없고 밑이 편평하다. 일상에 사용하기 위한 것과 무덤에 껴묻거리로 넣기 위한 것으로 나뉘며, 민무늬토기 역시 지역마다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청천강 이남의 대동간과 재령 지역을 중심으로 강화도까지 분포하는 각형, 압록강 중상류에 분포하는 공귀리식 토기, 청천강 이북·압록강 하류·송화강·중곡 동북 지방에 분포하는 미송리식 토기, 함경도 일대에 분포하는 꼭지 손잡이가 달린 삼발형 토기, 충청도와 전라도에 분포하는 송국리식 토기 등이 있다. 또 각 지역은 독특한 토기 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역 간에 서로 교류했던 현상도 보여 주고 있다.

 

동검 청동기문화의 대표적 유물로 비파형과 세형이 있다. 비파형 동검은 검의 날과 손잡이가 분리 제작되어 조립되어 조립된 것이 특징이며 중국 요하 유역의 요령 지방과 한반도에서 출토되고 있다. 특히 중국 동북 지방과 한반도 서북구 지역에 집중되어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이 동일 문화권임을 파악하는 근거가 된다. 세형동검은 비파형에 비해 폭이 좁고 길며 한반도 전 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고인돌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 형식. 함경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과 요동 지역에 분포한다. 형태상으로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한다. 북방식은 넓적한 굄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 모양이고 거의 한강 이북에 분포하고 있으며, 강화도와 황해도 은율의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남방식은 매장 시설이 지표면보다 낮게 마련되어 있고 둘레에 받침돌이나 돌무지를 두고 위에 덮개돌을 덮어 덮개돌만 땅 위에 올라와 있으며 주로 영호남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에서 나오는 대표적 유물은 돌칼과 토기류이다.

 
© LoggaWiggler, 출처 Pixabay
 

 

단군왕검 고조선의 첫 임금. 단군의 단은 박달의 우리말 '빛' 광명을 나타내는 표기이며, 단의 다른 표기로 종교전문가, 제사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을 뜻하는 왕검(임금)이 결합되어 고대의 제정일치적 지배자를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

 

천부인 지배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 청동기문화 단계로 보아 천부인은 지배자가 쓰는 관과 청동검, 거울, 집단적 의식에 쓰이는 북 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준왕 단군왕검이 세운 고조선의 마지막 왕. 연나라에서 넘어온 위만이 기원전 194년 왕검성으로 쳐들어와 정권을 빼앗자, 쫓겨난 준왕은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준왕이 정착한 지역은 전북 익산 또는 경기도 광주 부근이라는 설이 있다.

 

하호 촌락을 구성하고 있던 농민층을 지칭하는 용어.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 "읍락에 호민이 있고, 민은 하호로서 모두 노복과 같은 처지에 있다."라고 전한다. 2~3세기 무렵의 고대 사회 구성에서 하호는 제가나 호민, 대인등으로 표현하였던 지배층에 대비되는 피지배민을 가리킨다. 신분상 노예는 아니었으나, 하호의 성격은 일률적이지는 않았다. 동예나 옥저의 경우는 읍락의 구성원으로서 일종의 집단 예민적인 존재였고, 고구려에서는 사회적 계층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여 그 성격이 빈농, 용작민 및 귀족의 예속 농민이었다.

 

강상무덤과 누상무덤 요동반도 남쪽 끝 여대시 감정자구 후목성역에 위치한 고조선 지방 귀족의 무덤. 1964년 발굴되었다. 강상무덤은 기원전 8~7세기경의 무덤인데, 언덕 위에 검은흙이 섞인 자갈을 씌운 큰 돌무덤으로 동서 28m, 남북 20m의 모욕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모두 20개의 무덤구덩이가 있다. 강상무덤에서 발굴된 인골은 약 140명분이고 껴묻거리로 비파형 동검, 창끝, 화살촉, 비녀, 청동기를 만드는 거푸집과 장식품 등이 출토되었다. 누상무덤은 기원전 7~5세기경의 무덤으로, 동서 30m, 남북 20m의 직사각형 묘역을 만들고 가장자리는 석회암 판석으로 가지런히 둘러놓았다. 묘역 한가운데 잘 다듬은 판석을 깐 2기의 돌덧널무덤이 있고 둘레에는 보통 돌덧널무덤 8기가 있다. 가운데 무덤에서 비파형 동검과 방패, 수레의 부속품들과 도끼, 끌 등 90여 점의 청동기, 청동 장식품들이 출토되었고 50여 명의 인골이 발굴되었다. 가운데 2기의 무덤은 주인공의 것이고 둘레의 것은 노비가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덤을 통해서 고조선사회는 청동기문화가 매우 발달하였으며 강한 권력을 가진 귀족과 노비가 존재했고 순장제가 행해졌던 사회임을 알 수 있다.

 

왕검성 고조선의 수도. 그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의 평양 지역 또는 원래 요동 지역에 있다가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고 보기도 하고, 요하 근방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조선의 세력 범위와 영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왕검성의 위치도 달라진다.

 

낙랑 한(漢) 나라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두었던 4군 중 하나. 한 무제는 조선에 낙랑군을, 진번과 임둔 고지에 각각 군을 두고 이듬해에 고구려 예맥에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82년 진번과 임둔 양군을 파하고, 현도군이 토착민의 반발로 서북쪽으로 옮겨 가게 되자 그에 속하였던 일부 현들도 낙랑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중국 왕조의 변천에 따라 후한, 서진의 지배하에 있다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 고구려에 멸망되었다.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데, 처음 설치될 때 위만조선의 옛 땅을 중심으로 대체로 지금의 평안남도 일대와 황해도 지역 일부가 포함된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학자들은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왕검성도 평양이 아닌 대릉하 동쪽에 있었다고 보고 낙랑군의 위치도 요하 부근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사군의 통치는 사실상 낙랑이 중심이었고 낙랑 문화는 한 문화의 연장이었다.

 


사료탐구

단군신화 옛날 하늘신 환인의 아들 환웅은 천하를 다스리고 인간 세상을 구할 뜻을 품고 있었다. 환인이 그 뜻을 알고 천하를 살펴보니 태백산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만한 곳이라 천부인 3개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3000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 신단수밑에 내려와 그곳을 신시(神市)라 하였다. 환웅천왕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호랑이와 곰이 와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환웅에게 빌었다. 환웅은 쑥과 마늘을 주며 그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곰은 이것을 지켜 삼칠일 만에 여자가 되었다. 곰 여자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어 신단수 밑에서 빌었다. 환웅이 잠시 남자로 변하여 혼인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 권 1, 기이 고조선)

 

위만의 집권 조선왕 비(丕)가 돌아가고 아들 준(準)이 왕이 된 지 20여 년에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 제, 조나라 백성들이 괴로워하다가 차츰 도망하여 준에게로 갔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와서 살게 했다. 한(漢)이 노관으로 연왕을 삼자 조선과 연은 추수로 경계를 이루었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키고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인 위만도 망명하여 호복 차림으로 동쪽으로 추수를 건너 준왕에게 가서 항복하고, 서쪽 국경 지방에서 살게 해 달라고 청하면서 중국에서 망명하는 사람들을 거두어 조선의 변병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설득했다. 준왕은 위만을 믿고 박사로 삼고 홀을 주며 땅 100리를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위만은 거짓을 꾸며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나라 병사가 열 길로 쳐들어오고 있으니 들어가 숙위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결국 돌아와 준왕을 공격했다. 준왕은 위만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좌우 궁인을 거느리고 달아나 바다를 건너 한(韓)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 왕이라 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조선의 8 조법금 조선 백성들에게 법금 8조 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곧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게 한다. 도둑질한 자가 남자이면 그 집 종으로 만들고, 여자이면 여종으로 만든다. 스스로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돈 50만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되어도 풍속에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며 결혼을 하려고 해도 짝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사는 법이 없었다. ('한서' 지리지)

 

한의 고조선 침략 (위만의)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 때에는 꾀어낸 한(漢) 망명자가 대단히 많았다. 이에 천자에게 알현하지 않으며, 진번 주변의 여러 나라들이 글을 올려 천자를 뵙고자 해도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나라 사신 섭하가 와서 타일렀지만 우거는 끝까지 조서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았다....(중략)... 좌장군은 급히 조선을 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상(相) 노인(路人), 상 한음, 니계상 참, 장군 왕협이 서로 의논하기를 "처음에 우리는 누선에게 항복하려 했던 것인데, 이제 누선은 체포되었고 좌장군이 그의 군사들까지 하쳐서 싸움이 더욱 급하니 우리는 능히 저들과 싸울 수가 없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고, 한음, 왕협, 노인은 모두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했는데, 노인은 도중에 죽었다.

원봉 3년 (기원전 108) 여름에 니계상 참은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와서 한에 항복했다. 그러나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고 우거의 대신 성기는 여러 번 관리들을 못살게 굴었다. 이에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長)과 항복한 상, 노인의 아들 최를 시켜 그 백성들을 잘 타이르게 하고 성기를 죽였다. 한은 조 선을 평정하고 4군을 두었다. ('사기' 조선열전)

 

 

출처: "한국사의 이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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